이 말씀은 2천년 전에 역사상 실제로 있었던 일이요 앞으로 마지막 때에 동일하게 있을 그 일에 대한 비밀이 담겨있다. 그런데 그 일은 아버지의 아들로서 이 땅에 인자로 오셨던 나사렛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른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되 그렇지 못했던 성전의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동일한 일이 은혜시대가 끝나고 환난 때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도 그대로 이루어지리니 누구든지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말씀을 잘 깨달으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생명에 거할 수 있다.

 

구약의 예언대로 이 땅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는 아버지를 믿는 유대인들 가운데 가난한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으셨으나 성전을 지키고 있던 자들에게는 전혀 환영 받지 못하셨다. 하지만 메시아를 사랑한 소수의 백성이든 사랑하지 않은 다수의 백성이든 그리스도를 따른 제자들이든 성전에서 제사를 인도하며 설교하던 목자들이든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바로 의롭고 거룩한 자에게는 그 거룩한 육체의 생명을 주고 불의하고 죄악된 자에게는 악한 자의 부활을 주기 위해 메시아가 심판 주로서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모세를 통해 받은 율법과 계명과 법도와 함께 선지자를 통해 받은 예언도 있었으나 이미 광야생활을 할 때부터 장로들과 레위자손의 말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는 메시아에 대한 유전과 전통의 가르침도 있었다. 하지만 성전의 목자들은 모세오경을 주로 가르치며 예언도 전했으나 자신의 혀가 만들어내는 유전과 교훈을 더욱더 강조해서 가르쳤다. 이처럼 목자들은 모세율법과 예언보다 자기들의 유전과 가르침을 더 전했으며 그로 인해 백성들은 그것을 더 많이 들어오고 있었으되 참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은 목자들이 전하는 설교가 옳은지 그른지 구약을 펴 비교하지 않고 ‘목자들의 말이니 당연히 맞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성전목자들이 가르치는 유전과 전통의 권위는 당연히 기록된 토라와 예언보다 더 위에 있었고 백성들은 날 때부터 토라를 미간과 손목에 매고 늘 외우면서도 스스로 세뇌를 당했던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이전부터 들어오던 메시아에 대한 유전과 전통의 가르침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는 이것이었다. “거짓메시아가 오면 그는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로도다. 그러므로 그가 오면 이 성전을 무너뜨리므로 너희들이 여호와로부터 흩어질 것이로되 너희들은 그 자를 오히려 기뻐하겠노라. 그러나 반대로 성전을 지키는 자들은 오히려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겠도다. 그것은 성전을 지키는 자들이 그 성전으로 인하여 백성들을 오직 여호와께로 묶으려 함이로도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예루살렘성전을 무너뜨리신 후에 그들을 자기에게로 오게 하여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임을 가르치시므로 백성들도 오직 인자를 통하여 아버지와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알리셨다. 또한 백성들이 절기를 지키므로 거룩한 것이 아니요 날마다 그 거룩의 길을 걸어야 함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목자들은 크고 화려한 그 성전의 자리에 앉아 자신이 얻는 썩어질 육의 부요와 영광에 마음이 있었으니 성전의 가르침은 ‘육 일 동안은 세상에 나가 열심히 살되 거룩한 날은 오직 거룩하게 지켜야 함이로도다.’라며 오히려 백성들을 세상으로 흩어지게 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입을 벌린 독사처럼 자기의 유익을 위해 백성들의 영혼을 육과 세상으로 이끌되 말씀을 이용하는 그들을 독사새끼들로 보셨고 성전목자들은 메시아를 매우 미워했다.

 

또한 당시 성전목자들은 이 마지막 때에 많은 수의 영혼들을 이끌고 있는 목자들처럼 지 애비와 애미 때부터 육의 풍성함과 세상의 명예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들이 만일 성전에서 나와 메시아를 믿고 따르려면 자기의 손에 있던 부와 명예를 다 내려놓아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으니 자신에게 육의 풍성함과 영광을 가져다 주고 있는 그 예루살렘성전을 무너뜨리고 있는 메시아를 환영할 수 없었다. 또한 거룩의 일을 하는 그들이 정작 거룩에 마음이 없었으니 마지막에 십자가를 통해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분명히 보고도 지금까지 참된 메시아를 거부하며 신명기18장의 유전을 들먹이며 예수를 죽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되 666을 넣어줄 가짜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환난 때에 썩어질 것과 헛된 곳에 마음을 둔 목자들도 마지막 때가 되면 택함 받은 일곱교회를 미워하며 이단으로 정죄하되 전통을 이용한다.

 

유대인들이 태어날 때부터 가르치며 들어오던 두 번째 유전과 전통은 이것이었다. “처음에 오는 자는 거짓된 자요 나중에 오는 자가 진짜이니 처음에 오는 자는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요 성전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로되 둘째로 오는 진짜 메시아는 너희들과 함께 모든 이스라엘백성들의 그 민족을 되찾아 해방과 평화를 주겠노라.”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은 유대를 침략한 로마와 싸워 해방을 얻는 것이 아니요 자신의 마음 안에 거하는 선악과 싸워 죄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니 오히려 그들에게 이웃민족을 불쌍히 여기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천년왕국의 안식은 은혜시대와 환난시대가 끝나고 인자의 재림 후에 이루어지고 영원한 안식은 그 천국의 끝에 영원한 셋째하늘로 올라갔을 때 시작된다. 그러므로 가난한 백성들은 그 가르침이 아버지의 사랑과 공의임을 깨닫고 거룩한 성전의 복음을 이루고자 메시아를 사랑하며 따라다녔다. 그러나 성전목자들과 다수의 백성들은 자기의 원함을 이루어주지 않는 그리스도를 두 번째 유전과 전통에 따라 가짜로 여겨 십자가에 못박고 지금까지도 자신의 거룩에 애쓰지 않고 이웃에 거하는 나라들과 싸우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무엇을 위해 그 오랜 싸움을 하고 있으며 또한 언제까지 그렇게 칼과 총을 들고 전쟁을 연습할지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적그리스도와 함께 3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의 완전한 해방을 얻고 전쟁의 끝에 평화를 맺을지라도 나중에 가짜메시아에게 버림받는다. 하지만 그 버림받음을 통해 가난한 백성들은 오히려 깨달음을 얻어 2천년 전에 오신 나사렛예수를 메시아로 믿게 된다. 또한 그들이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다시 토라와 예언을 보니 그때서야 비로소 그들의 마음에서 거룩의 믿음이 회복되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약속한 신약도 믿는다. 그러므로 가짜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하나로 묶고 666을 들고나왔을 때 그들이 이방민족의 일곱 교회와 하나가 되어 함께 싸우되 목 베임으로써 그 원수와 세상에게 넉넉히 승리한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 독사새끼들 가운데 바울처럼 뒤늦게 성전에서 돌이킨 소수가 다시금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며 또한 열방의 전통에 거하는 영혼들 가운데서도 오직 소수가 돌이키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던 군중들과 병든 자들과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과 가룟유다는 모두다 유대인들이기에 죄에서 자유케 하는 권위나 죽은 자를 살리거나 병 고치는 능력이 오직 여호와께 있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나사렛예수라는 그 인자가 아브라함이 받은 그 복음과 부활의 언약에 이르게 하는 바로 그 메시아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즉 교회시대로 말하면 이방인의 믿는 자들은 이미 보고 들어서 진리와 생명은 그리스도임을 믿고 있지만 문제는 자신의 목자들에게 듣고 있는 그 말씀들이 2천년 전에 십자가를 지신 바로 그 그리스도께로 나온 생명과 진리의 말씀이냐 아니면 사람의 유전과 전통의 가르침에 속한 비 진리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가난한 백성들은 유전과 전통의 가르침에 의해 거짓메시아인 인자를 어떻게 구별했으며 그리하여 사망으로 이끄는 성전에서 돌이켜 나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었는가?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마지막 때에는 어떻게 유전과 전통의 수많은 비 진리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참된 진리를 구별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그때나 교회시대나 마지막 때나 참으로 쉽고 간단하고 정확하고 이성적이고 인격적이니 자신의 속마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 또한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을 들을 때 과연 무엇을 믿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볼 때에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았기에 육적이고 세상적인 복과 형통처럼 보이는 말씀들이 있다. 또한 말씀을 전할 때 자기의 생각을 넣어 사람들을 그리스도가 아닌 자기에게로 이끄는 목자들도 있고 거룩에 마음 없는 율법의 행위로 인도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므로 전통은 사람의 유전과 교훈을 전하며 들어왔으나 성경에는 고난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따르며 죄와 세상을 이기고 영광스런 부활에 이르는 십자가복음도 밝히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기에 다수가 전자의 말을 달콤하게 여기며 따르고 있으니 후자보다는 전자의 말에 더 권위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공적인 복음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원수가 주는 그 육과 세상의 시험에서 승리하시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사람들에게 썩어질 육을 채우시거나 사망으로 들어갈 이 세상의 높은 곳에 앉히시거나 사람의 생각과 의와 선으로 이끌게 하시거나 거룩에 마음이 없는 행위와 열심으로 이끄시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십자가의 물과 피를 통해 그들의 몸이 성전이 되게 하시어 아버지와 하나되므로 평화를 이루게 하심이었다.

 

하지만 믿는 자들 가운데 다수는 그때나 지금이나 십자가를 볼 때 자신의 안에 거하는 죄와 또한 이 세상을 이긴 후 거룩한 몸을 입고 부활에 이르는 믿음보다는 자신이 전통에서 들어온 것들을 믿음으로 바라보니 멸망으로 들어가는 이 세상에서 돌이키지 못한다. 또한 자기생각과 지식으로 푸는 말씀을 끝까지 진리로 붙들리니 마지막 때에도 전자는 후자를 미워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끝까지 자기의 생각과 세상을 따르는 목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영혼들은 세상에게 버림을 받고도 끝까지 바빌론에 남는다. 그러나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펴 비교한 후 거기서 나온 영혼들은 광야에서 거룩의 믿음을 회복하리니 어떤 이는 휴거로 어떤 이는 목베임으로 어떤 이는 666을 받지 않고 다른 지체들과 함께 도망을 다니다 살아서 천국에 들어가 생명을 얻는다.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