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과 가인이 그리고 야곱과 에서가 동일한 아비와 어미의 사이에서 나왔다 할지라도 아버지께서는 아벨과 야곱은 받으시되 가인과 에서는 받지 않으셨다. 한편 이삭과 이스마엘은 비록 그 밭이 틀려도 아비는 동일했으되 오직 이삭은 받으시고 이스마엘은 받지 않으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12이 자신을 따랐으되 11제자들은 받으시고 오직 한 제자는 받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신가? 결코 그렇지 아니하시니 여기에는 사람이 인격과 이성을 가지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세 가지의 기준이 있다.

 

     첫째 그에게 육과 세상의 욕심이 있느냐 아님 영과 하늘의 욕심이 있느냐이다. 그러므로 육의 욕심을 품은 자는 진리는 버리고 썩어질 것을 구하며 즐기되 마음이 가난한 자는 썩어질 것은 버리고 오직 진리를 구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영원한 것은 포기하고 세상에서 높아지며 잘되기를 원하되 하늘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헛된 것을 내려놓고 오직 아버지의 영원하신 나라와 의를 구한다. 그런데 육의 욕심은 사람을 죄로 이끌고 세상의 영광은 불의한 자에게 주어지되 진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곳으로 이끌고 하늘의 영광은 오직 의롭고 거룩한 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어떤 영혼을 받으시어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곳으로 이끄시겠는가?

 

      둘째 인격체에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사람은 마음에서 죄가 나오니 육적인 욕심을 부리거나 불의한 자신을 의롭게 여기거나 자신을 높이기 원하면 누구나 동일하게 범죄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죄를 범한 후 상한 심령을 가지고 통회하며 그 죄가 자신에게서 떠나가기 원하되 어떤 사람은 사랑의 주님께서 용서하셨다며 그것을 은밀히 품고 계속 기뻐한다. 그러므로 전자는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요 후자는 있으되 버린 자이다. 그런데 그 소중하고 거룩한 마음을 버렸다는 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계속 더럽히겠다는 것이니 아버지께서는 어떤 영혼을 자신의 품에 안으시어 위로해주시겠는가?

 

     셋째 주님께로 향한 마음에 흔들림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누가 합당한 자인지 깨달을 수 있는 비유로서 어떤 남자가 자신의 마음과 목숨을 바쳐 한 여자를 사랑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 몸을 이루었으며 그 여자는 남편으로부터 늘 만족을 얻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여자는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키 큰 남자에게 다리를 벌린 후 자기남편에게 와서 사랑한다 말했다. 이에 그 남편은 그것은 당신 자신과 나를 더럽히는 것이니 돌이키라며 용서해주었다. 그러나 여자는 음욕이 차지 아니하니 이번에는 하체가 큰 이웃집 남자에게 다리를 벌린 후 남편에게 와서 사랑하노라 말했다. 이에 남편은 이번에도 돌이키라며 용서해주었으나 여자는 그것도 부족해 이번에는 시장에 가서도 그것을 행하고 사랑한다 말했다. 이에 남편은 또다시 용서해주고 이것이 마지막이니 돌이키라고 했다. 그러나 여자는 사방에서 남자들을 불러 오히려 자기가 그들에게 돈을 주고 했으니 남편은 결국 여자를 쫓아냈다. 그러므로 자신이 과거에는 비록 창기였다 할지라도 목숨까지 바쳐 자신을 사랑해준 남자를 만났다면 그 후로는 그것을 멈추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한 영혼이 거듭나기 전에는 그가 비록 세상을 따르며 세상과 간음했다 할지라도 신랑인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영접한 후로는 그것을 멈추는 것이 옳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고 오늘은 자기의 남편과 내일은 다른 남자와 번갈아 한 몸을 이룬다면 그것은 자신만이 아니요 자기의 신랑과 또한 다른 지체들까지 더럽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어떠한 영혼을 합당하게 받으시리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영혼들을 공평하게 보시며 대하시니 사울과 다윗도 바로 이 기준들로 가까이 혹은 멀리 두셨다. 그러므로 다윗은 육과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오직 거룩을 이루기 원하는 그 소원으로 인하여 아버지의 마음에 합했다. 그러나 육의 부요와 세상의 헛되고 영광을 위해 아버지의 그 뜻을 차버린 사울은 그의 인격과 이성이 올바르지 않기에 폐하셨다.

 

    그런데 원수는 거룩을 이루고자 애쓰는 자를 핍박하며 죽이기 원하되 그와 가까운 자들 가운데 자신의 마음에 합한 자를 이용한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가인과 에서는 자신이 가진 힘을 가지고 아벨과 야곱을 핍박하며 죽이고자 했고 유다는 그렇게 할 힘이 있는 거짓된 목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넘겼다. 이러한 이유로 다윗 역시 세상의 권세를 가진 사울에게 핍박 받으며 도망을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윗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자들과 함께 성소에 들어가 그 거룩한 떡을 취했다. 하지만 그날은 바로 안식일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버지와 양들이 아닌 오직 자기자신을 위해 목자의 일을 하던 자들이 변경한 율법과 유전에 따라 두 개의 법을 어겼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다윗이 행한 것에 대하여 안식일이나 성전의 법을 범한 것으로 보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다윗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과 함께 거룩한 만찬을 나눈 것으로 보셨다. 그 이유는 다윗이 핍박 받으며 쫓겨 다닌 것은 거룩을 위해서였으며 그것을 먹은 것도 자신의 육의 욕심이나 세상의 영광을 얻고자 함이 아니요 거룩에 힘을 쓰기 위해서였다. 또한 왕이 될 자신을 따르며 함께하는 영혼들에게도 주님의 그 도를 가르치므로 그들도 거룩에 애쓰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그 떡을 먹어야 할 자가 먹었기에 아버지께서는 다윗에게 죄가 없는 것으로 보셨으며 오히려 그의 깨끗한 마음을 아시고 합당한 그를 계속 자신의 오른손으로 붙드셨다.

 

     한편 그리스도의 당시 자신을 위해 목자의 일을 하던 성전의 인도자들은 늘 그리스도를 뒤따라 다니며 이미 고소할만한 것들을 충분히 모아두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신령한 율법이 아닌 자신들의 율법으로 그리스도를 붙잡기 위해 기다리던 차에 비로서 제자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자 곧바로 안식일을 범했다며 고소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자신이 옳다는 것을 보이려면 그들에게 우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또한 다윗은 거룩을 이루기 위해 다니며 그것을 먹었으니 율법을 범한 것이 아니요 오히려 옳게 행한 것임을 알리셔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그 내용을 알리지 아니하시고 단지 다윗의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물으셨으니 그 이유와 목적은 이것이었다.

 

     첫째 그들은 아버지께 합당치 않은 마음을 품은 자들이니 주님을 알되 거룩을 이루려는 자들이 아니요 오히려 거룩을 이루고자 애쓰는 자들을 핍박하며 죽이고자 하는 자들이다. 또한 그들의 마음은 자신과 가족의 육의 욕심과 또한 자신이 높아지는데 가있으니 더러운 떡을 상에 올려 제사 드린 후 그것을 먹고 얻은 힘으로 양들을 육과 세상으로 이끌되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반문하는 자들이다. 그리하여 거룩을 모르는 그들은 어디를 펴서 어떤 말씀을 보아도 들어도 오직 자신의 그 유익만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 어리석은 자들에게 진리를 허락하신들 그들이 어떻게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있으리요? 오히려 화만 부르게 된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보여주어도 보지 못하고 들려주어도 듣지 못하는 그들에게 진리를 전하므로 화를 부르는 대신 주님의 사역을 한다며 오히려 진리를 전하는 자들을 잡아 죽이므로 아버지와 멀어진 자신을 끝까지 돌이키지 않으려는 그들의 그 악한 마음을 찌르기 원하셨다. 그러므로 이전부터 내려오던 율법으로 이제는 자신을 잡으려는 그들에게 그들보다 더 위에 있는 다윗과 또한 구약의 제사장이 어떻게 했는지를 알리셨다. 즉 너희가 만일 너희가 가진 법으로 나를 잡는다면 동일한 그 법으로 다윗과 제사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심판을 내리겠느냐는 의미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