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위하여*

     어떤 남자가 껌을 가지고 있다가 껌을 씹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자신에게 하나밖에 없는 그 껌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그러므로 그 껌을 받은 사람은 자기에게 껌을 준 그 남자에게 고마워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은혜를 마음에 기억하고 있다가 자신에게도 껌 하나가 생기자 그것을 자기가 씹지 않고 그 남자에게 주었다. 그러자 그 남자는 그 사람이 하나밖에 없는 껌을 자기에게 주었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이번에는 영원히 씹을 수 있는 껌을 주었다.

 

     이와 같이 사람은 고작 껌 하나를 거저 받아도 감사하며 또한 그것을 기억하다 다음에 자기에게도 껌이 생기면 자기에게 껌을 준 그 사람에게 갚아주려는 마음이 있으니 그 마음은 인격체에게 당연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거듭남의 은혜를 받은 자는 껌 하나가 아닌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가장 귀한 은혜를 받은 영혼은 고난스럽더라도 아버지의 그 뜻을 이루고자 애쓰는 것이 마땅하다. 사람이 자신의 안에 있는 그 죄의 나무를 뽑아내고 거룩해지는 것이 바로 사랑과 은혜를 베푸신 아버지의 원하시는 바요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피 흘려 죽으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또한 그가 비록 사단의 깊은 것과 깊은 원리의 싸움을 모른다 할지라도 자신의 안에 원수의 선악의 나무와 아버지의 생명의 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생기로 인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니 자신의 안에 있는 그 죄의 뿌리를 뽑고 이기는 자가 되어 그 부활의 생명에 이르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원한다는 증거로서 이러한 말들을 한다. “내가 온전히 변화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내가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 나의 안에서 음란과 욕심이 떠나기 원한다. 나를 찌르는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하고 싶다.” 심지어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제자가 되면 새롭게 될 수 있다는 말도 하니 그들은 깊은 원리의 싸움도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이렇게 은혜를 알고 갚을 줄 아는 인격체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자신도 그것을 원한다고 말하되 많은 자들이 거듭난 후 어리석게도 그리스도의 교훈을 받지 않는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셨음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그리스도께서 뿌려주시는 그 피로 영혼이 살고 강건해지므로 죄와 세상에 대해 승리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받지 않는다. 한 가지 비유를 통해 그들이 그 교훈을 거부하고 있는 마음의 상황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예순 네 살 먹은 할아버지가 테이프를 넣고 손가락으로 동작버튼을 눌러서 듣는 큼지막한 기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일곱 살짜리 아이가 새로운 아이팟을 들고 화면에다 손가락을 대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 할아버지는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작은 기계를 보더니 그게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영화와 음악을 원하는 만큼 언제 어디서나 보고 들을 수 있는 기계라고 대답했다. 아이의 말을 듣자 노인은 자기가 가진 것보다 아이의 것이 훨씬 더 좋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이는 할아버지가 자기가 가진 아이팟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아이는 아이팟 사용법을 할아버지에게 가르쳐주고 싶어서 켜는 법부터 시작해 손가락을 대고 움직이는 방법들을 하나씩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나는 인생을 많이 살았으니 잘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나는 너무 늙어서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입으로는 '응 그래! 응 그렇구나!'라고 대답하면서도 꼬마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다. 그리하여 할아버지는 아이팟 사용법을 전혀 배우지 못했으니 처음에 아이팟을 켜는 그 간단한 방법도 몰랐다. 하지만 아이팟을 켜고 싶을 때마다 꼬마에게 배우려고 하기보다 항상 꼬마를 불러서 켜달라고 했다. 이에 꼬마는 할아버지도 배우면 쉽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때마다 자신은 너무 늙어서 못한다며 거부했다. 하지만 그것은 늙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기가 싫어서 못하는 것이었으니 늙어서 못한다는 그 말은 자신과 아이를 속이는 말이었다. 저녁때가 되자 그 아이의 가족이 함께 모여 가정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마흔 여섯 살 먹은 그 아이의 아비는 평소에 늘 이렇게 가르쳤다. “기도할 때는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구해야 한단다. 찬송할 때는 온 힘을 다해야 한단다. 그리고 말씀을 들을 때는 온 정신과 온 생명을 다해 들어야 한단다.” 그러나 아비는 가정예배에서 그렇게 기도하거나 찬양하거나 말씀을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이는 그것을 보고는 자기의 부모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엄마 아빠 기도는 눈물을 흘리며 하고 찬송은 온 힘을 다해서 하고 말씀은 온 정신과 온 생명을 다해 들어야 돼요!” 그랬더니 아이의 부모는 이렇게 말했다. “응 그래 너는 그렇게 잘하거라. 나는 잘하고 있단다.” 그러면서 아비는 오히려 그 어린애를 혼내며 계속 이것저것을 가르쳤다.

 

     이와 같이 거듭난 영혼이 그 교훈을 받지 않는 첫 번째 이유는 몰라서가 아니라 배우기 싫어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십자가로 섬김의 교훈을 보여주셨다. 이때 그가 주님을 섬기려는 마음이 진실하다면 그가 무엇을 행해야 하리요? 그는 오직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먼저 십자가에 담긴 아버지의 그 뜻과 비밀을 배워야 하며 그것을 알고 난 후에는 자신도 한걸음씩 그 섬김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자들이 거룩하게 되어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그 교훈을 거부하니 그것은 그들이 전통에 너무 오래 거했기 때문이 아니요 육신의 죽음이 다가왔기 때문도 아니요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에 한계가 있어서도 아니요 오로지 배우기 싫어서 못하는 것이다.

 

     그들이 거부하는 두 번째 이유는 마음 없는 섬김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밖에 있는 영혼들도 기도하며 찬송하며 말씀을 들을 때 그것에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해야 함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섬기지 못하니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통의 행위와 법을 지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오히려 자신은 주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들은 육과 세상에서 마음을 돌이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교훈을 받지 않은 자들은 과정에서 온전케 된 후 주님의 백성으로서는 섬길 수 있되 성소에 들어가 아버지의 자녀와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서는 섬기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누가 그리스도를 따라 성소와 지성소로 들어가 주님을 섬길 수 있는가? 자신이 은혜 받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가 자신에게도 껌이 하나 생기면 그것을 자기가 씹지 않고 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바치려면 우선 십자가와 진리의 비밀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거듭나 이제는 교훈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된 영혼은 먼저 갈급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배운 후에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더 이상 자기의 뜻과 계획이 아닌 거룩을 이루겠다는 마음을 품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나서야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으니 사람은 마음과 믿음이 있으면 행위가 나오기 때문이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