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3:1-2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아버지께서는 태초에 시간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시간을 둘째하늘에 두시고 이 첫째하늘의 시간을 돌리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 첫째하늘에 육신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즉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며 미래로 갈수도 없다. 또한 이 첫째하늘이라는 공간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한 육체를 입고 부활하셨다. 그리고 그 거룩한 육체는 셋째하늘의 흙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무엇도 그 거룩한 육체를 막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앞으로의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신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과 계획이 있을 때 시간을 뒤로 돌리실 수도 있다. 또한 이 넓은 첫째하늘을 손바닥처럼 보고 계시며 아주 작은 공간에서처럼 다니고 계신다. 그리고 둘째하늘도 그와 같이 보고 계시며 그와 같이 다니고 계신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시니 이 첫째하늘의 마지막을 다 알고 계신다. 그리고 부활하셨을 때 교회들이 앞으로 어떻게 되어져 갈지도 아셨다. 또한 교회시대에 책망 받을 영혼들과 칭찬받을 영혼들이 생겨날 것도 알고 계셨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들이 책망 받고 사망으로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오히려 자신의 몸 된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하므로 거룩한 육체의 생명에 이르기 원하셨다. 그러므로 교회시대의 일들을 미리 알리고자 일곱 교회의 환상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를 들어 버가모교회시대가 되자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을 거룩한 모임에 불렀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게 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공중권세 잡은 자가 그들의 모임가운데 역사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버가모교회시대에 그렇게 될 것을 이미 2천년 전에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버가모교회의 환상에서 사단의 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또한 두아디라교회시대가 되자 그리스도의 교훈을 받지 않고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많이 생겼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그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두아디라교회의 환상에서 그 두 종류의 영혼들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사데교회시대가 되면 죽은 자들이 나타날 것을 아셨다. 그리고 그것을 아셨기에 이러한 말씀을 주신다. 계3:1을 보자.
이 말씀을 깨닫기 위해선 믿음과 행함과 행위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한 가지 비유를 통해 믿음과 행함과 행위의 차이를 깨달을 수 있다. 또한 살아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에 대해서도 깨달을 수 있다.
한 아비가 세 명의 아들들을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 첫째 아들은 늘 아비와 함께 거하며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아들의 몸은 항상 깨끗했으며 늘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 아들은 밖에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더러운 흙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므로 어느 날 그 둘째와 셋째 아들은 온 몸과 옷에 더러운 흙탕물을 묻히고 들어왔다. 이에 그 아비는 더러움이 묻은 아들들에게 이런 말들을 해주었다. “아빠가 너희들에게 형처럼 깨끗한 옷을 입혀줄게! 하지만 깨끗한 옷을 입기 전에 먼저 너희들의 몸을 깨끗이 씻어라! 그리고 형한테 너희들이 씻는 것을 도와주라고 할게.” 그 말을 듣자 둘째 아들은 자신도 형처럼 깨끗해 질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 그러므로 목욕탕에 들어가 옷을 벗고는 애써서 온 몸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형을 불러서 자신이 씻지 못하는 곳을 씻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셋째 아들은 뒷마당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곳 저곳 땅을 파며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가 열심히 일하면 아빠가 좋아하실 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셋째 아들은 그 일을 하면서 자신을 더욱더 더럽혔다.
이와 같이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이 거룩에 이를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 죄의 뿌리가 뽑혀질 것을 믿는 것이다. 마치 그 둘째 아들이 자신도 형처럼 깨끗해 질 수 있다는 것을 믿은 것과 같다.
하지만 사람은 마음속에 있는 선악과를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뽑지 못한다. 거룩한 육체를 입을 수 있는 그 구원에로의 거룩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이룰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거룩의 일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그러므로 아버지께로 그 거룩한 믿음의 선물을 받은 자는 자기가 그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리하여 가장 먼저 그는 자신의 의와 생각을 다 내려놓고자 애쓰게 된다. 즉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아버지께서 주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따른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그에게 진리를 허락해주신다. 또한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그 거룩한 살과 피도 허락하신다.
이때 그는 거룩에 마음과 믿음을 두고 그 거룩한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 즉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영광스러운 것으로 그의 살과 피가 깨끗해져 가는 것이다.
사람은 또한 진리에 순종하므로 씻겨진다. 그러므로 거룩에 마음과 믿음이 있는 그는 자신이 받은 말씀의 기초와 율법과 법도에 마음을 다해 순종한다. 즉 거룩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며 거룩에 애쓰는 것이다.
마치 목욕탕에 들어간 둘째 아들이 옷을 벗고는 온 몸을 깨끗이 씻고자 애쓴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렇게 그리스도의 믿음과 말씀에 순종하는 행함이 있는 자는 산 자이다. 그리고 그는 그 살아있는 믿음으로 인하여 거룩에 이른다. 즉 빛이 임한 그의 마음 안에서 원수가 심은 그 죄가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는 믿음과 행함이 있는 그에게 그리스도와 같은 그 거룩한 육체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교만한 자를 멀리하신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을 믿는 것인지 그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또한 행함이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거룩에 이르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고자 애쓰는 것 임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는 말하길 구원은 믿음으로 얻고 상급은 행함으로 얻는다고 한다. 또한 행함으로 더 좋은 구원을 얻는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도 한다.
그러면서 그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믿음과는 무관한 예배와 전도와 봉사와 구제와 선교와 헌금에 애를 쓴다. 게다가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하며 다른 자들도 그 행위로 이끄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거룩의 믿음이 없이 행위만을 드리는 자는 행위가 곧 율법이 되어버린다. 행위가 율법이 되어버린다는 것은 이러한 뜻이다.
죄의 뿌리가 뽑히는 거룩한 구원에는 믿음과 더불어 율법에 순종함으로 이른다. 그러므로 온전한 구원을 이루고자 한다면 반드시 율법에 순종이 필요하다. 그러나 거룩의 믿음 없이 행위만을 드리는 자는 자신의 행위를 율법으로 여긴다. 즉 자신의 행위들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착각으로 인하여 율법의 행함이 아닌 자기의 행위만을 드리게 된다. 즉 열심히 자기의 행위로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자기의 행위로서 모든 것을 이루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율법의 행위를 아무리 많이 드려도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그 죄의 뿌리를 끊어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누구도 행위로는 거룩과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믿음을 가진 자요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의 믿음이 없는 자는 늘 율법의 행위에 힘을 쓰게 된다. 그 이유는 그것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룸이 아니요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자들이 사데교회시대에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들은 사데교회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즉 자기의 행위가 곧 율법인 자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참으로 많아져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시간에도 그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이루려고 애쓰고 있다. 또한 마음과 믿음은 그 속에 없으되 행위로 모든 것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마음과 믿음이 거룩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아신다. 그리하여 그의 행위가 죽은 것 임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거룩에 이르지 못한 그는 그 거룩한 육체의 상급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는 사데교회시대에 왜 죽은 자들이 생겼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 이유를 그 당시에 있었던 한가지의 운동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
당시에 믿는 자들의 안에서 율법을 아예 없애는 운동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없애자고 한 율법은 거룩에 마음과 믿음이 없는 행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버지의 신령한 율법을 없애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어리석은 운동으로 인하여 믿음과 행함은 다른 것이라고 여겼다 또한 누구든지 믿음만 있으면 살과 피를 드리는 행위를 하라고 했다. 그러므로 믿음의 행함이 없어 거룩에 이르지 않은 자들도 피를 흘리곤 했었다.
그들은 또한 거룩에 이르고자 애쓰는 행함은 뒤로하고 오직 믿음만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위는 늘 죄악으로 가두어져 있었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며 육체로는 세상의 쾌락을 즐겼던 것이다.
이처럼 사데교회시대에는 거룩의 행함을 원치 않는 자들이 생겼다. 즉 그 둘째 아들과 같이 목욕탕에서 자신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그 애씀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버지의 뜻을 원치 않는 자들은 이제 자기의 뜻을 이루어가기 시작했다. 즉 거룩의 행함은 원치 않고 오히려 자신의 행위를 율법으로 여기는 자로 변해갔던 것이다.
마치 자신의 몸은 씻지 않고 뒷마당에 나가서 열심히 땅을 판 그 셋째 아들과 같이 변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사데교회시대에 죽은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유는 오직 하나이다. 즉 아버지의 뜻을 원치 않는 자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을 교회가 용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교회를 인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을 원치 않는 자는 이 마지막 때에도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에 애쓰는 그는 입술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생각들을 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죄악에 있더라도 아버지나라에서는 아들딸이 되겠노라. 그 이유는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눈으로 이러한 자는 죽은 자이다. 그러므로 죽은 그는 육의 사망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마음에 있는 죄를 꺼내신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죄를 품고 있던 그에게는 그 거룩한 몸을 허락지 않으신다. 그리하여 죽은 자는 그 거룩한 몸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이 죽은 자에 대한 말씀을 주시며 일곱 영과 일곱 별을 말씀하신다. 계3:1을 보자.
일곱 별은 교회와 함께 하는 종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종들을 통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신다. 또한 그들을 통해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일곱 별은 아버지의 뜻대로 교회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며 보호하는 종들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그 일곱 별을 가진 이로서 죽은 자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리고 죽은 자는 아버지의 뜻을 원치 않는 자요 자기의 행위로 구원을 이루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일곱 별을 통해 그 죽은 자는 인도하지 않으시겠다는 의미이다.
반면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자를 그 일곱 별을 통해 인도하시겠다는 뜻이다. 또한 말씀에 마음을 다해 순종하므로 거룩에 이르고자 하는 자도 역시 그 일곱 별로 인도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산 자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약속으로 인하여 이 마지막 때에도 말씀의 깨달음을 얻고 있다. 그리고 그 깨달음으로 인하여 주님 오실 그날을 기다리며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일곱 영은 120종 가운데 있는 종들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거룩하신 영께서는 완벽한 인격들로 역사하실 때가 있다. 이때 일곱 영은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그 완전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그 깨달음을 얻은 자는 피 흘리기까지 순종하는 그 길을 끝까지 걷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에 대한 말씀을 하시며 그 일곱 영을 함께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주신 이유를 깨달으려면 먼저 다음과 같은 배경을 알아야 한다.
사데교회시대 당시에는 율법을 없애는 운동이 있었다. 즉 오직 믿음만이 중요하니 율법의 행함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이 없이는 사람은 죄의 뿌리를 끊지 못한다. 그리고 죄를 이기지 못하니 거룩에 이르지 못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인 거룩에 이르지 못하니 거룩한 육체를 얻지 못한다. 즉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없애자는 것은 곧 아버지의 뜻을 원치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원치 않는 것은 곧 구원을 원치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늘 진리를 원한다. 그리고 그 바른 진리를 따라가며 구원에 이르기 원한다. 그러므로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그러한 사데교회의 상황에서 오직 말씀을 사모하며 깨닫기 원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율법을 없애자고 하는 상황에서 ‘오직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아버지 완전한 아들 완전한 영으로써 그 일곱 영을 통해 말씀의 깨달음을 주신다. 그리고 일곱 영은 그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말씀을 사모하며 깨닫기 원하는 자에게는 그 깨달음을 허락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일곱 영을 가진 이로서 말씀하신 이유는 말씀을 사모하며 깨닫기 원하는 자에게는 그 깨달음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와 아들과 거룩하신 영께서 완전한 인격들로 역사하시어 그 일곱 영을 통해 허락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약속을 인하여 사데교회시대에 말씀을 원했던 자들은 그 하늘의 상급들을 다 얻기 원했다. 또한 그 일곱 별을 목표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지막에 그 살과 피를 내어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약속은 이 마지막 교회시대에도 동일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세 인격의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에도 교회를 도우신다. 즉 그 일곱 영을 통해 도우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에 이르는 자에게는 그 약속하신 상급을 주신다. 즉 마지막에 피를 드리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와 같은 그 거룩한 육체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상급은 제사를 드린 자에게는 감당치 못할 상급이다. 그 상급이 감당치 못할 상급인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서는 무엇을 행한 자와 이기는 자에게 상을 준다. 그리고 상을 줄 때는 일등은 무엇 이등은 무엇 삼등은 무엇 하면서 차례대로 주게 된다.
그러나 셋째하늘에서는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 되는 자들에게는 오직 아버지의 권세를 주신다. 그리고 그 권세를 가진 자는 그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게 된다.
하지만 사데교회시대에 피의 제사를 드린 자들은 아들과 딸 되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그 아버지의 권세에 대해선 더더욱 몰랐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피의 제사를 드린 그들에게 그들의 상상보다 더 큰 것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즉 아버지의 권세를 가진 아버지의 자녀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상급은 그들에게 감당치 못할 상급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일곱 영에 대한 말씀은 죽은 자를 위한 말씀이 아니다. 그 죽은 자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오히려 말씀을 사모하며 말씀을 깨닫기 원하는 자를 위한 말씀이다. 또한 말씀을 깨닫고 그 피의 제사로 나가는 자들을 위한 소망의 말씀인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그 죽은 자들에게 온전함을 찾지 못한다는 말씀을 주신다. 계3:2을 보자.
행위의 온전함이란 거룩에 마음과 믿음이 있는 순종의 행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행위가 온전하려면 우선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에 이른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의 마음이 육과 세상이 아닌 거룩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거룩의 믿음을 가지고 자신이 받은 말씀에 마음을 다해 순종하는 행함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행위가 온전한 그는 죄의 뿌리를 뽑고 거룩에 이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피의 제사를 아버지께 드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데교회시대의 믿는 자들에게는 이 행위의 온전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행위의 온전함이 없을 것을 이미 2천년 전에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사데교회의 환상에서 행위의 온전함을 찾지 못했다는 말씀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들에게 행위의 온전함이 없었던 이유는 그 당시의 인도자들의 가르침을 깨달으면 알 수 있다.
당시 교회를 인도하는 자들이 이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믿고자 하는 자가 많이 있음이 보였다. 그러나 그 많은 자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드리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즉 교회로 사람이 많이 모일 수도 있고 오히려 빠져나갈 수도 있는 그 상황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상황에서도 그가 바른 인도자라고 한다면 행위가 온전해야 한다는 말씀을 전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에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원한다면 썩어질 육과 세상에서 그 마음을 떼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말씀에 순종하는 행함 들이 있어야 한다고 전해야 한다.
그러나 당시 인도자들의 마음은 아버지께 있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도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마음이 가있었으며 모든 것을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이끌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인도자들은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죽음이다.
그러나 만일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하면 많은 자들이 교회를 떠나게 된다. 그 이유는 많은 자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드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교회의 인도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남는 것을 원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를 위한 것이 아니요 자기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렇게 말을 바꾸어 전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법은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와 상관이 없으며 사람의 도덕법도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오직 십자가의 법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며 자유롭게 행위하며 자유롭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는 십자가에서 주어지니 십자가 앞에 나와서 그러한 자유를 얻으십시오. 그리고 그 자유를 가지고 다시금 세상으로 나가십시오.”
이와 같이 사데교회 당시의 인도자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사람을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도자들로 인하여 많은 자들이 그 세상의 자유를 취했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며 자신의 마음을 세상에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음란한 마음으로 교회와 세상을 오가면서 세상의 더러움을 교회로 들여왔던 것이다.
결국 그런 음란으로 인하여 사데교회시대에는 두 가지의 결과가 생겼다. 첫째 거룩에 마음과 믿음이 없는 예배가 그때부터 교회에 있었다. 둘째 십자가의 죽음을 각오하지 않은 종들이 교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마지막 때에도 많은 교회가 마음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많은 자들이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도 교회를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한 행위를 찾을 수 없는 그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허락하신다. 계3:2을 보자.
거듭난 자가 만일 아버지의 뜻을 원치 않고 아버지의 뜻을 행치 않으면 그는 죽은 자가 된다. 그리하여 죽은 자는 자기의 뜻을 이루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율법의 행위로는 죄의 뿌리를 뽑지 못한다. 그리고 죄에 졌으니 그 거룩한 육체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생명 없는 일에 애쓰고 있는 헛된 자임을 알 수 있다.
반면 그리스도의 첫사랑을 잃은 자는 자신의 마음을 다시금 육과 세상에 둔다. 그리고 마음을 다른 곳에 두니 온전한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 없는 예배를 드리며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도 교회를 인도하게 되는 것이다. 즉 교회와 세상을 번갈아 오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세상에서도 살고자 하며 하늘나라에서도 살고자 하는 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죽은 자와 온전한 행위가 없는 자는 그 행위를 아무리 많이 오래 드려도 그 생명에 이르지 못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자들이 생명에 이르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하신다.
즉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면 셋째하늘에서 죽는 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반면 셋째하늘에서 살고자 하면 이 세상에서 죽을 것을 다짐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살고자하는 자는 셋째하늘에서 죽게 될 것을 더욱더 굳게 하며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셋째하늘에서 살고자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죽게 될 것을 더욱더 굳게 하며 그 죽는 날을 기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