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묻혀 살다가 절망을 겪고,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돌이켜 생명의 근원되시는 아버지께 다시 돌아오기도 합니다.  

 

진리에 대한 갈급한 마음에 성경을 보며 광산에 금을 캐듯 파헤쳐 보다가, 결국 깨닫기 어렵기에 여러 신앙서적을 통해 마음의 그 갈급함을 해결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지나쳐 난해한 성경 구절들을 깨달았다 싶으면 기쁜 마음에 변론하는 상대방을 낮게 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선 겸손하신 분이시니 교만하지 말자 하면서도 자신은 높아만 갑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셨던 알 수 없는 그 빛은 더욱 자신을 애통케 하니 순간마다 자신이 구제할 수 없는 커다란 죄인이라는 사실에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누가 나 같은 불의한 죄인을 구원하리요! 변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진리라 이름하는 갖가지 해석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은 그것이 자신을 그 애통함과 수고와 무거움으로부터 전혀 자유케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누가 알며 나아가 누가 그분을 위로하리요!

 

죄인이 짐승에게 안수하고 자신의 죄를 전가시켜 피를 단 사면에 뿌린다거나, 제사의 종류와 제사를 드리는 방식과 절기와 나아가 율법과 계명과 법도에 매여 전전긍긍 하기도 하고, 창조와 구원에 대한 말씀들에 고민도 하고, 심판에 관한 예언의 말씀들에 매여 부지런히 찾고 또 찾아보기도 합니다.

 

짐승의 피를 대신 바치는 것이 결국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한다는 사실도 별로 놀랍지 않을 즈음엔, 또다시 앞선 그 죄로 인한 애통함과 수고와 무거움에 짓눌려 있는 자신을 바라봅니다. 십자가를 보고 또 보아도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붙들고 늘어지며 언젠간 언젠간 하던 적이 몇 번이었는지!

 

과연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과연 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얻었도다. 그러면 무엇인가? 내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나님의 자녀라 생각하고 누리기만 하면 되는가? 아니면 죽은 뒤에 그 믿음으로 자녀가 되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에는 나 같은 자녀들이 많을진대 그곳엔 자녀들만 있는가? 

 

그러함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괴로운 이유가 무엇인가? 자꾸만 떠오르는 부인할 수 없는 고민은 이러한 죄의 몸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 왠지 무언가 꺼림직하다는 것이다. 왜 나는 나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고 타인의 허물만을 보는가? 내게서 나오는 이 혈기와 시기와 미워함과 간음과 교만과 게으름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다가 그저 눈감고 짐짓 가져가도 괜찮은 것인가?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깨닫기까지 믿는다 하는 우리들은 부지런히 연구합니다.

 

죄 사함은 놀랍고 크신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랍고 크신 가려진 은혜는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선악의 뿌리를 뽑아주신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우리를 육신 안에 있는 동안 거룩하게 해주신다는 것이니, 앞선 죄와 허물들로 인한 수고와 무거움으로부터 우리를 진정 자유케 해주신다는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 이루어 주신 것은 죄 사함이 다가 아니요 이 첫째하늘을 아버지의 뜻대로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지나고 나니 결국 아버지의 온전하신 뜻을 깨닫기 위해 걸어왔던 여정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룩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에 그리하여 깨끗한 영과 혼과 육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거룩하신 영의 의롭고 거룩한 나라에서 아버지의 자녀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예수의 형제자매로서 다시 만나게 될 날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태초에 세우신 그 비밀의 경륜을 위해 택해주신 은혜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베푸신 그 크신 사랑과 거룩하신 영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깨달은바 하나님께 깨끗하게 드려진 그 마음과 결단을 변치 아니하고 그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나가기를 원합니다. 빛으로 흑암을 이기기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