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로 아버지의 율법을 모세를 통해 받았으되 오히려 주신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있으니 백성들은 이미 자신이 율법과 그 행위들을 통해 의롭다 함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의롭다 함을 확증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완악하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의요 율법인 그들의 마음이 아버지께로 향하여 있지 아니하며 자신의 교만과 선악에 있으니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그러한 마음을 나타내신 말씀이다.
또한 그들이 고침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것은 그 마음이 잘못된 것을 지적 받아 또 다시금 그들이 그 율법을 하나씩 하나씩 마음을 다해 지켜야 할까 두려움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유로써 교회시대에 가시밭을 가진 목자들은 늘 말씀을 바꾸어 자기의 생각으로 가르치니 어떤 영혼이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요 복 받으려면 꼭 십일조를 바치라는 말을 50년 동안 들어오다 어느 날 자신이 직접 성경을 펴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율법을 폐하셨고 믿는 자는 십일조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드리는 것으로 나와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가시밭이기에 자기가 들어온 말과 자신이 행하던 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기뻐하며 자신을 고치기보다는 오히려 다 드린 자들을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며 결국에는 바리새인들과 하나되어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자들을 잡아죽이고는 십일조가 옳다고 소리를 높였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만군의 여호와를 통해 아버지의 음성을 받아 전했던 그 말씀을 듣지 않던 구약유대인들의 그 마음상태나 현재 그리스도께로 셋째하늘의 비밀과 거룩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는 백성들의 그 마음상태가 동일하다.
누구든지 마음이 청결하면 보고 죽는 아버지의 영광과 얼굴과 손을 또한 보이지 아니하는 셋째하늘을 볼 수 있다. 자신이 실제로 보지 못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오직 믿음과 마음으로 볼 수도 있다. 즉 그 누구도 들려주지 않는 셋째하늘의 비밀을 오직 말씀으로 깨달은 후에는 그 좋은 것을 믿고 소망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자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죄악에 있기에 볼 수 없는 것이니 하늘의 소망과 믿음을 얻고자 하는 자는 썩어질 것에 대한 믿음과 헛된 곳에 대한 소망을 구하는 그 마음에서 돌이키는 것이 정직한 순서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