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모양 다른 느낌

 

세 사람이 ‘죽음과 부활’이란 영화를 보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죽기 위해 애써도 죽지 못했으니 그의 삶이 오늘도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으리라는 예상을 누구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물과 흙이 닿으니 껍질이 부드럽게 되어 죽은 후로는 드디어 싹트기 시작했다. 또한 하늘에서는 빛과 물을 내려주고 땅에서는 양분을 올려주니 깨끗한 열매를 많이 맺었다. 반면 다른 씨는 떨어져도 죽기 싫었으니 아무리 물과 흙이 닿아도 껍질이 그대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상태로 싹터서 열매를 맺었으니 전부다 병든 것들만 맺었다. 그러다 어느덧 가을이 되자 과수원주인이 와서 은그릇에는 깨끗한 열매를 담고 금그릇에는 올바른 열매를 담았다. 그리고는 종에게 좋지 않은 열매를 맺은 나무와 가지와 열매는 전부다 도끼로 찍어서 불태우라고 명했다. 그런데 병든 열매들이 불에 닿자 과육과 씨가 전부다 불타서 없어졌으나 몇몇 씨들은 과육만 타고 씨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러므로 주인은 종에게 남은 씨들을 동그릇에 담아서 가져오라고 명하고는 자신의 양손에 은그릇과 금그릇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며 영화가 끝났다. 하지만 세 명이 동일한 시공간에서 같은 영화를 보아도 각자 깨달음이 달랐다. 그러므로 삶도 달라졌다.

 

이와 같이 거룩에 이른 자와 애쓰는 자와 애쓰지 않는 자는 단지 이 말씀만 아니요 성경을 열어 어떤 말씀을 보아도 각자의 깨달음이 다르니 언제 어디서나 자기가 믿는 만큼의 말과 행위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가을에 과수원주인의 금그릇에 담겨 집으로 돌아가는 날을 소망하며 또한 자신의 마음과 몸을 다해 깨끗하고 올바른 열매를 맺으며 자신이 죽는 그날을 향해 걸어간다. 한편 물과 흙에 닿아 부드럽게 변하고 있을 때는 그가 비록 깊은 깨달음은 얻지 못할지라도 알쏭달쏭한 상태에서 더욱더 자신의 죽음을 원하며 말씀에 순종코자 애쓴다. 반면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했으니 자신은 죽지 않아도 부활할 것이라고 믿는 게으른 자는 ‘이게 말이야? 방귀야?’라고 생각하며 고난과 영광의 복음을 거부하되 정작 자신이 죽어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믿는 자들 가운데 거룩에 이른 자는 깨달을 것이요 애쓰지 아니한 자는 깨닫지 못함을 알기에 오직 깨닫는 자들에게만 전하고자 기록하므로 믿고 애쓰는 자는 애를 더하게 함이요 애쓰지 아니하는 자는 더 애쓰지 못하므로 공동체에서 스스로 나오게 함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7월 17일 같은 모양 다른 느낌

 

믿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