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위하여*

 

초대교회 당시 이방지역에 있던 라오디게아 교회의 지체들과 이 마지막 교회시대의 믿는 자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으니 비유를 통해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진 가난한 영혼들은 그의 영을 통한 주님의 책망과 징계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돌이키므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고 거룩을 이루었으니 성전에 들어가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거룩하신 아버지의 앞에서 먹고 마시는 그 약속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깨달은 영혼도 라오디게아 교회시대가 끝나며 환난으로 들어가고 있는 이 마지막 때의 믿는 자들이 왜 책망과 징계를 받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자신을 돌이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열심을 내면 그 복음의 약속에 참예할 수 있다.

 

어떤 남자가 작은 진주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진주는 비록 크기가 작아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가장 귀한 것이기에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고 아무리 높은 자도 가질 수 없고 아무리 오래 많이 일해도 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소중한 진주를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값없이 전해주고 싶었으니 그것을 작은 상자에 넣고 하얀 종이로 포장했다. 반면 어떤 여자에게 바보상자가 있었는데 그것은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볼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여자도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에게 그것을 주고 싶어 포장하니 상자가 크고 화려해서 모든 사람의 눈이 좋아할만한 했다. 이제 남자와 여자는 각각 작고 큰 선물을 들고 자기가 아는 여자를 찾아가서 이것은 당신을 위한 선물이라고 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남자의 선물은 크기가 작은 것을 보고 실망해 풀어보지 않았으나 여자의 선물이 큰 것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며 기대에 부풀어 뜯어보았다. 그러므로 여자는 밤낮으로 사람들을 모아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즐기며 배우처럼 변해갔으되 눈과 귀가 텔레비전에 빠져 남자가 준 작은 상자를 끝까지 뜯어보지 않았으니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몰랐다.

 

이처럼 사람이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으면 우선 포장을 풀어 그 안의 내용을 보아야 그가 기뻐할 터인데 그때와 지금 사람들의 공통점은 가장 작은 박스를 보고는 실망한다. 즉 이 마지막 시대에는 말씀을 전하는 자도 말씀의 비밀을 알려고 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주장으로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말들을 가르치고 전하고 있으며 또한 듣는 자들도 그 말이 그 말이라며 자신의 믿음을 쌓아 올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비판하며 율법과 세상을 따르되 마음 없는 행위에는 열심을 낸다.

 

게다가 목마르지 않은 자들은 큰 상자를 보고는 매우 기뻐하니 많은 사람이 모이길 원하며 많은 돈이 들어오길 바라며 오직 큰 건물로 들어가길 기다리며 열심을 낸다. 그리하여 공동체로 누가 어떤 마음을 품고 들어와도 교인들을 데리고 나가지 않는 한 환영한다. 오직 사람의 수가 많으면 그저 흡족하다. 물질을 낸 자가 아버지의 마음에 합당치 않아도 그것이 어떤 돈이라도 많으면 그저 좋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사람이 쌓은 이 세상의 모든 건물이 땅속으로 내려가도 다가오는 한민족의 환난 때 큰 도시들의 많은 건물이 무너져내려도 상관없다. 오직 무너지게 될 그 건물을 크고 아름답게 올리며 성전건축이 복된 일이요 이것이 교회라는 거짓말로 많은 영혼을 생명 없는 곳으로 이끌되 전쟁과 666의 전날까지 그럴 것이요 중에도 끝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러하니 이 마지막 때의 부요한 자들이 어찌 주님께 책망과 징계를 받지 않을 수 있으리요? 그러나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아무에게나 아니요 오직 사랑하시는 자에게 허락하시고 사람의 입장에서도 오직 주님을 향한 사랑이 충만한 자만 그것을 받고 받은 후에 돌이킬 수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셨으니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그 피의 사랑만을 생명만큼 귀히 여기는 자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요 주님께서도 그런 자를 사랑하시니 그들은 부모자식간에 산 같은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누가 참 아들이며 누가 사생자인가? 즉 아버지께서 거듭난 영혼들 중에 누구에게는 은혜를 베푸시어 그 영광의 빛들을 보게 하시고 그 길에서 그것을 베푸시되 누구에게는 은혜를 거두시니 그것은커녕 믿고도 어둠에 거하게 되는지 비유를 통해 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한 아비가 두 아들을 데리고 있는데 첫째는 오직 일만 열심히 하는 자이니 바깥에 나가서 열심히 농사를 짓고 밭을 가꾸었으되 아비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에 아무리 오랫동안 일을 많이 할지라도 늘 아비가 원치 않는 큰 일을 벌였고 둘째는 늘 아비의 품에 있는 자로서 아비와 함께 거하는 시간이 많기에 자연스레 책망을 많이 듣고 훈계도 많이 받았기에 오히려 그것을 통해 아비의 마음과 뜻을 알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오직 아비가 원하는 일만 했으니 아비의 마음도 늘 둘째에게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아비는 첫째가 일하고 돌아왔을 때 그에게 잘했다고 칭찬한 후 그가 일한 만큼에 맞는 상급을 주었으되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꾸지람을 주었고 늘 자신의 품에 거하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작은 일에 충성한 둘째는 오직 칭찬과 상급만 받았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생각에서 돌이키고 불의와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나와 자신의 거룩한 품 안에 거하는 영혼을 사랑하시며 그가 오직 아버지의 뜻만 이루어가길 원하신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한 몸에 거하는 영혼에게 소망의 빛을 깨우쳐주신 후 그가 의롭고 거룩하게 되도록 비로소 은혜로 가르치며 함께하는 스승을 통해 책망과 훈계를 주시되 그것은 마음을 찌르는 것이요 채찍질처럼 아프다. 하지만 부모에게 매맞을 때 잘못했다고 빌며 그 사랑의 품에 안기는 자식이 있듯이 그것을 받는 자는 사랑을 받는 영혼이니 그는 공동체 안에서 오직 거룩을 이루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뜻에 이른 영혼들이 그 거룩한 육체를 입은 아버지의 거룩한 빛의 자녀로서 맏아들과 형제자매로서 거룩한 장막에서 즐거운 만찬에 참여하며 주님의 그 한 품에 함께 거하며 영원한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반면 동일하게 맞아도 매를 싫어하며 오히려 부모를 원망하며 그 품에서 도망가는 자식들도 있다. 즉 육신의 생각을 따르는 자와 썩어질 것을 더 얻기 위해 헛된 세상에 거하는 자는 책망과 훈계를 받거나 받은 후 돌이키지 못하리니 그들은 십자가의 영생보다 이 세상의 다른 형상을 생명만큼 소중히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승의 책망과 훈계가 없으면 거룩을 이루지 못하리니 자녀 됨의 그 약속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또한 그가 평생 아무리 크고 많은 일을 이룰지라도 마지막 심판대에서는 오히려 책망을 받고 아버지와 아들께로 멀리 거하게 된다. 아버지의 뜻과 반대되는 모든 말과 행위는 오직 자신의 욕심과 의와 영광을 이루기 위한 불법이기 때문이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보배

너는

가자

회개하라

천국무도회

Come to me

넌 기쁨이어라

각이 뜨인 사랑

여기에 모인 우리

내 너를 향한 마음은

널 사랑한 흔적

이천 년 동안

청혼

확증

복음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