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사람의 육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글로 쓰여지며 육의 귀로 들을 수 있는 말로 전해진다. 반면 진리는 영이기에 아무리 들어도 들리지 않고 아무리 보아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진리는 육신의 눈과 귀로 보고 듣는다 할지라도 깨닫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남편과 아내외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과 몸을 주면 그것은 음행이요 간음이다.’라는 글을 적었다. 그리고 그 글을 현재 음행과 간음을 하며 그 죄를 즐기는 A와 B라는 두 여자에게 보여주었다. 

 

   A는 평소 그 죄를 즐기기는 했으나 양심에 가책이 있었으니 그 죄를 범하면서도 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죄악된 즐거움을 멈추기 원했다. 결국 A는 그 글을 보고난 후로 오직 자신의 남편에게만 마음과 몸을 주었다. A라는 여자는 그 글을 보았을 때 보았으며 깨달았던 것이다. 

 

   B는 평소 그 죄를 범하면서도 늘 마음이 기뻤으며 늘 그 죄짓는 순간만을 기다렸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더 오랫동안 그 기쁨과 즐거움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러므로 B는 그 글을 보고도 음행과 간음을 지속했다. 결국 B라는 여자는 그 글을 보았을 때 보지 못했으며 깨닫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누구나 진리를 보고들을 수 있도록 해두셨다. 또한 모든 자들이 진리를 보고 듣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마음의 눈과 마음의 귀를 주셨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 마음의 눈과 마음의 귀가 열려있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닫혀있다. 그런데 그 열림과 닫힘의 기준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마음의 죄악이다. 즉 마음에 죄악이 있기에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죄악을 깨끗케 하고자하는 사람이니 그는 그 닫혔던 마음의 눈과 귀가 열리기 시작한다. 만일 자신을 더욱더 깨끗케 하고자하면 더욱더 밝고 크게 열린다. 

 

   이와 같이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마음의 눈과 귀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진리를 통해 신성하고 영광스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결국 생명과 사망이 자신의 선택인 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이 자신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버지께로 가는 진리의 말씀은 거룩하다. 진리이신 그리스도 역시 의롭고 거룩하시다. 또한 아버지께서 거하시는 영원한 셋째하늘도 거룩하다. 

 

   그러므로 자신을 깨끗케 하길 원하는 자에게 또한 거룩한 자에게 그 진리가 보이고 들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 놓으신 아버지는 의로우시고 공평하시다.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